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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도민뉴스 박은희 사회공헌위원회 팀장 |
오래 계획하고 꼼꼼하게 준비한 건 아니었지만 남편이 퇴직 한 후 귀촌을 선택했다. 오랜 삶의 터전이었던 도시의 일상들을 정리하고 터를 옮겨 앉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컸기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가로 막아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처지라 감히 귀농이라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텃밭에 여러 가지 작물을 심고 기르고 수확하는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첫해에는 손가락 발가락을 다 합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욕심껏 많은 종류의 작물을 심었다. 작물마다 생육환경이 다르니 일일이 보살피는 일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이듬해, 그 이 듬해가 되면서 작물의 종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이건 대부분의 귀농귀촌 인이 저지르는 실수란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미숙한 나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농촌 생활은 전쟁의 연속이다. 첫 번째 전쟁 상대는 풀이다. 뽑아도 뽑아도 끈질기게 돋아나는 생명력이라니, 화초나 작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키 작은 나무마저 잡초의 기세에 비명횡사할 지경이다. 매일 새벽에 눈을 뜨면서부터 화단의 풀을 뽑고 텃밭을 관리해도 성장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엄청난 생명력으로 어디서나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며 나는 두 손 들었다.
두 번째는 손님이다. 귀촌을 축하한다고, 농촌 생활이 궁금하다고, 나들이 갈 곳이 마땅치 않다고, 이런저런 이유로 손님은 끊임이 없다. 친구들, 동료들, 형제들, 자식들까지 번갈아 찾아주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때로는 지치기도 한다. 처음에는 손님. 이 온다고 할 때마다 이삼십 분 거리의 읍내까지 장을 보러 나가곤 했다. 2, 3년 지나다 보니 갑자기 찾아드는 방문객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도록 어느 정도 준비를 해 두곤 한다. 그러니 당신, 느닷없이 문득 오셔도 환영이다.
세 번째 전쟁은 농사다. 어느 듯 귀촌 4년 차가 되었지만, 올해에서야 초보 농부 언저리쯤 가보았다. 본격적으로 지은 첫 작물은 감자와 고구마다. 여름 감자 수확을 할 때는 설레기까지 했다. 형제들과 딸들, 손주들이 열 일 제쳐두고 도우러 왔기에 온 들이 웃음소리와 즐거운 소란으로 가득했다.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채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가족들. 밭둑에 서서 잠시 그 모습을 보는데 코끝이 찡해졌다.
건강한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제일 먼저 캔 감자를 솥이 넘치게 삶았다. 참 먹 자! 생전 처음 해보는 노동으로 배가 고팠던지 입이 미어지게 먹는 아이들 모습에 웃음보가 터졌다. 직접 수확한 것이라 그런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꿀맛이었다. 풍년 든 감자를 보니 나누어주고 싶은 사람들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더러는 팔고 더러는 선물하고 더러는 그냥 퍼주며 나누는 재미가 쏠쏠했다.
수확하고 나누는 기쁨 에 더하여 드디어 농부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목까지 차올랐다. 여름 휴가차 찾아온 지인들에게도 아낌없이 한 보따리씩 안겨 보내는 사이 여름이 훌쩍 지나갔다. 지대가 높다 보니 여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대신 겨울이 길다.
겨울이 오기 전에 또 한 번의 수확이 남았다. 고구마 수확 날짜가 정해지자 어김없이 가족들이 모였다. 감자 수확을 해 본 경험이 있어 그런지 기특하게 작업복도 야무지게 챙겨왔다. 저녁에는 안부를 나누느라 지지고 구우며 떠들썩하게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다음 날, 깨우지도 않았건만 새벽부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장을 챙기고 줄지어 밭으로 향했다. 고구마도 감자만큼 잘 영글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일꾼은 이렇게 많은데 수확물이 너무 빈약하면 영 체면이 서지 않을 테니 말이다.
멋모르고 배워가며 할 때 제일 잘한다던 어른들 말씀이 괜한 게 아니었다. 줄기를 걷어내고 땅을 파니 실한 고구마가 올망졸망 예쁘게도 달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탄성을 쏟아내며 힘든 줄 모르고 수확을 끝냈다. 생각보다 수확량이 많아 넉넉하게 나누어 먹고도 넘치게 남았다. 겨우내 난로는 손님이 올 때마다 달큰한 군고구마 냄새를 품게 될 터이다.
이런저런 전쟁을 치르기도 하지만, 전쟁과 전쟁 사이에 있는 것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도시에서는 느끼지 못한 미세한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감지하게 된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매일의 새벽과 매일의 저녁이 다르다는 것도 새삼 느낀다.
새벽미명의 오소소 한 물기와 고요속에서 생명들이 깨어나느라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벅차오르며 내 몸과 마음의 세포들이 따라서 깨어난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일몰을 기다리는 시간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일과다. 변화무쌍한 빛깔들이 느린 걸음으로 서쪽 하늘을 수놓으며 하루가 저문다. 그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있다 보면 순식간에 어둠이 모든 밝은 것들을 삼켜버린다. 산골의 어둠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두껍고 깊다. 흡수되어버린 나는 한동안 망부석처럼 꼼짝하지 못한다. 가장 먹먹해지는 시간이다. 무심한 듯 손 내밀어 응원해주는 이웃도 빼놓을 수 없다하여 내 시골 살이는 '때문에 와 '더불어'와 '덕분에'로 정리할 수 있겠다.
풀과 뱀과 벌레 때문에 힘겹고 놀라기도 하지만, 무게중심은 당연히 '더불어 와 '덕분에 로 심하게 기운다. 따뜻한 이웃과 더불어, 찾아주는 지인들 덕분에 헐거우면서도 꽉 찬 하루하루가 쌓이고 있으니 말이다.